<김동연의 웹자서전 5화 “어머니”>
살면서 내 감성을 가장 쉽게 자극한 단어를 하나 고른다면 그건 ‘아버지’란 단어였다.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끔 글로 쓰면서 눈에 안개가 서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반면 어머니에 대한 감성은 죄송하게도 그리 애절하지는 않았다. 일찍 직장생활과 가장 노릇을 했던 내게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생각은 절절했던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덤덤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해 봄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한참을 모시고 살았지만 여러 해 전부터는 혼자가 편하다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시는 어머니께 반찬을 갖다 드리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의례적인 인사로 시작했다.
“춥지 않으세요? 난방은 괜찮고요? 어디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그러다 무심코 여쭈었다.
“쌀은 떨어지기 전에 늘 사다 놓으시죠?”
“응. 항상 20킬로짜리 사다 놔”
“20킬로 사갖고 오려면 무거울텐데 10킬로짜리 사다 드시지요. 그것도 한참 드실 텐데. 쌀독에다 부으려면 힘드시잖아요.”
어머니는 방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손으로 쓱 훔치며 혼잣말처럼 무심히 말씀하셨다.
“10킬로짜리 사다 쌀독에 부으면 반도 안 차. 쌀독이 비어 있으면 너희 어렸을 때 힘들었던 생각이 나서 싫어. 그래서 항상 20킬로짜리 사다 쌀독 차게끔 부어놔. 그러다 쌀독 웬만큼 비기 전에 다시 사다 채워놓고.”
나는 어머니의 대답에 그냥 무너져 내렸다. 애써 태연한 척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다 나오긴 했지만 주차장 차 안에서 소리 죽여 한참을 울었다. 세 끼를 온전히 챙겨 먹기 힘들었던 시절 끼니로 자주 먹던 수제비. 외상 달고 됫박으로 샀던 쌀. 많이 못들이고 몇 장씩 사다 쓰던 연탄. 그 시절의 어머니를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살며 얻은 내 작은 성취의 모든 뒤안길에는 자신의 삶이라곤 거의 없었던 어머니의 희생이 곳곳에 배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둘에 혼자되시고는 열한 살 장남인 나부터 네 살짜리 막내까지 자식 넷을 기른 어머니. 채석장에서 돌을 나르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캐서 길에서 좌판을 벌이기도 하셨던 어머니. 그때 어머니는 철인 같았다. 나와 동생들 앞에서 거의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내가 채 스물도 되기 전 가장으로 생계를 떠맡은 뒤에는 자주 눈물을 보이곤 했다. 강했던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이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나중 생각해보니 오래 참았던 원래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로도 표현하지 못하고 삭인 힘겨움은 또 얼마나 많으셨을까.
얼마 뒤 어버이날, 나와 형제들이 어머니께 점심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모였다. 내가 쌀독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머니가 담담한 어조로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을 말씀해주셨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 저녁으로 칼국수를 해먹었어. 밤늦은 시간 아마 10시 넘어서인가 동연이가 공부하다 나와서, 배가 너무 고픈데 혹시 아까 먹다 남은 국수 없냐고 했지. 칼국수를 끓여 국수는 너희들 주고 나와 너희 외할어머니는 국물만 먹었으니 국수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어. 없다고 하니 동연이가 혼잣말로, 보리밥이라도 좋으니 배 터지게 한 번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다면서 방으로 들어갔어. 그날 밤 자식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한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
여동생과 조카들은 눈물을 훔쳤지만 나는 태연한 척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우리들 앞에서 그렇게 하셨듯이... 가장이란 책임이 어깨에 얹어진 뒤에는 나 역시 어머니나 동생들 앞에서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 오랜 훈련의 결과였다.
지금은 곁에 계시지만 언젠가는 아버지보다 더 그리워할 분, 보고 싶을 때면 눈을 감아야만 비로소 볼 수 있게 될 분.
불현듯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꽃구경을 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을 보면 늘 천진스럽게 웃으시던 늙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젊은 어머니의 고운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통장에 잔돈 저금하듯이 지금부터라도 그 웃는 모습을 차곡차곡 내 마음에 쌓아야겠다. 그리고 훗날, 눈을 감아야만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때 그 통장에서 하나씩 인출해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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