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돌파구-유학길
<김동연의 웹자서전 3화 “돌파구-유학길”>
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대학생 그리고 더 깊은 밤에는 고시 수시 수험생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죽어라 공부했다. 이 세상 누구를 지금의 내 위치에 갖다 놓는다 해도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할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했다.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흔들리기 쉬운 이십대 초반, 가능한 한 최대한 생활을 단순화 시켰다. 돈 쓰는 유혹, 시간과 계절 가는 것에 예민하고 싶은 혈기를 누르려 애썼다. 결국 끝까지 직장생활을 하며 고시공부를 했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합격했다.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 발령받은 날에야 은행에 사직원을 냈다. 은행생활 7년 8개월, 내 나이 만 스물다섯 때였다.
어쩌다 그 시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난 주저하지 않고 한마디로 대답한다. 행복했었다고. 그때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절대 빈곤 상태에 있던 나와 우리 가정에 은행은 일자리를 주었다고. 지금도 가끔 만나는 은행의 옛 상사, 동료들은 십대 후반과 이십대 중반 내 인생의 선생들이었다고. 그리고 그 직장에서 마음씩 착한 아내를 만났다고. 계속해서 은행원 생활을 했더라도 공직생활 하는 것과 똑같이 열심히 했을 거라고. 그리고 아마도 똑같이 행복했을 거라고.
1983년 '행정공무원'으로는 총무처(現 행정안전부)와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에서, '입법공무원'으로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입법조사관으로 일하게 됐다.
사무관 발령을 받아 동기들과 함께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일이다. 중참사무관 한 명이 “학교는 어디 나왔나?”하고 돌아가며 물었다. 대답을 하고 방을 나가는 내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요새는 별 희한한 학교 나온 애들도 시험에 붙어 여기까지 오네”. 얼굴이 불에 댄 듯 뜨거워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전한 내 학벌에 대한 편견은 나를 더 공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고, 이후 경제기획원에서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 공부를 병행했다.
‘이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가야 할 다음 길은 무엇일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유학이 학력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위해서라도 꼭 가고 싶었다. 은행원을 하다가 공무원이 돼서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어려웠기 때문에 아내는 결혼 후에도 생계형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큰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을 늘 아쉬워했다. 시어머니와 시외할머니를 모시고 세 명의 시동생과 시누이를 건사하는 시집살이를 하는 아내에게도 돌파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근무평점을 잘 받고 장학생 후보로 추천을 받아야 했다. 열심히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죽어라 영어공부를 했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정도였다. 고시공부 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몇 년의 고생 끝에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됐을 때는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더구나 운 좋게도 미국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도 동시에 받아 박사학위까지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어렵게 유학의 기회를 잡아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에 가게 됐다. 정말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행복하고 안정적인 때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일을 병행하며 야간으로 다녔던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풀타임 대학생활은 내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지독한 회의(懷疑)’가 찾아온 것도 바로 이 때였다.
(4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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