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의 웹자서전 8화 “유쾌한 반란”>
큰 아들을 떠나보내고 국무조정실장으로 공직의 정점에 있을 때 ‘지금이 그만 둘 때’라는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예전부터 공직을 떠날 때를 나름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었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 비전이 없어질 때.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할 때.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할 때. 문제의 해결방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무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안(老眼)처럼 느끼게 될 때. 잘못된 정책을 국민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집하는 확신범이란 생각이 들 때.’
1년 가까이 표한 사의가 어렵게 받아들여졌다. 큰 아이가 세상을 뜨고 9개월이 지난 뒤였다. 대형 로펌들에서 제의가 쏟아졌다. 그걸 피하려고 경기도 양평에 농가 방을 얻어서 6개월 칩거를 했다. 근처의 중고등학교에서 강연도 하고 봉사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도 입각제의를 비롯한 여러 제안들은 계속됐고, 정중히 거절하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마침 아주대학교에서 총장 후보군에 올리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칩거에 들어가고 반년 뒤 아주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학생들을 많이 만나 대화하려고 애썼다.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총장으로 온 뒤 ‘파란학기제’라는 것을 만들었다. 파란학기라는 이름은 아주대의 상징인 ‘아주블루’ 컬러에서 따왔는데, 알을 깬다는 의미인 ‘파란(破卵)’과 우리 대학사회에서 ’파란(波灡)‘을 일으키자는 의미가 함께 담겨져 있다. 대한민국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나 활동을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도전학기제다. 이제까지 학교나 교수가 제시했던 과목을 학생들이 수동적으로 듣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내용을 제시하면 학교에서 심사해 과목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파란학기를 운영한 세 학기 동안 심사기준을 통과한 100개가 넘는 과목이 만들어졌다. ‘우리만의 모바일 웹 서비스개발’, ‘3인 소규모 인디게임 제작 및 출시 창업’, ‘농아인을 대상으로 수어를 활용한 봉사활동 및 학습지원’, ‘미국 건축 답사기 책 만들기’ 등, 학교나 교수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참으로 많았다. 참여한 학생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같은 학점의 정규과목 수강 때보다 세 배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했기에 모두들 즐거워했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누가 요즘 청년들이 꿈과 열정이 부족하다고 말하는가. 청년들이 얼마만큼 꿈과 열정을 펼칠 곳을 찾고 싶어 하는지, 도전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나 사회 시스템 때문에 얼마만큼 힘들어 하는지, 건강한 청년정신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대학 총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처한 환경을 깨는 노력에 작지만 힘을 보태고자 만든 프로그램은 ‘애프터유(After You)프로그램’ 이었다. 애프터유란 말은 영어권 국가에서 ‘나보다 당신 먼저’라는 뜻으로 남에게 양보할 때 쓰는 말이다. 어려운 사정으로 해외 경험을 쌓기 힘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해외연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했다. 아주대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타 대학 학생들도 뽑았다. 단순히 어려운 학생들을 시혜적으로 도와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만들고 싶었다. 장학금에 소요되는 경비는 전액 외부에서 모금을 했다. 모금 과정에서 절대 강요하지 않고 프로그램의 취지에 찬동하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토록 했다.
첫해에는 100명을, 둘째 해에는 151명을 선발했다. 학생을 선발할 때 학교성적과 어학성적은 안 봤다. 학교 성적, 특히 어학 성적은 소득수준과 상당히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 본인이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만 봤다. 학생들이 떠나기 전과 다녀온 뒤 사전·사후 멘토링에 참여한 기부자들은 “저 학생들이 이전에 우리가 만났던 그 학생들 맞느냐?”며 학생들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학교 계간지에 실을 목적으로 프로그램에 다녀온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한마디씩을 부탁했더니 이런 말들을 해줬다.
‘두려움도 새로워서 좋았다’
‘꿈과 욕심이 비만해졌다’
‘가슴에 큰 물음표 하나가 던져졌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더 크고 깊어지겠다’
‘도움을 받은 만큼 주는 사람이 되겠다’
‘자기 찬스’로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 도전을 겁내지 않고 실패를 기회로 만드는 사회, 서로를 공감하고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반란, 자기 틀을 깨는 자신에 대한 반란, 사회를 발전시키는 사회에 대한 반란, 이런 ‘유쾌한 반란’의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노력하는 과정이 더 가치 있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9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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